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독립 선언일(9월 2일)까지, 축구는 중요한 정치적 임무를 위한 가교이자, 심지어 혁명을 위한 도구로도 활용됐다.
“식민지 지배자의 오락에서 베트남 민중의 운동으로”
축구는 프랑스를 따라 1896년 남부 베트남(당시 코친차이나, 프랑스의 직접 통치령)에 처음 전해졌다. 처음에는 프랑스 군인과 관리들의 오락거리였으나, 곧 서기, 노동자 등으로 퍼지며 점차 베트남인들 사이에서도 대중화됐다.
1905년 사이공 항구에는 영국 군함 킹 알프레드호가 입항해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선수들로 구성된 팀과 친선 경기를 펼쳤다. 이 경기는 베트남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 축구경기로 평가된다.
1906년, 프랑스 스포츠 연합(L'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s Sports Athlétiques) 소속 E. 브레통이 남부 베트남에 축구 규칙을 보급하면서 축구에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규칙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 전통이 깊었던 Cercle Sportif Saigonnais 클럽을 프랑스식 축구 클럽 스타일로 재조직했다
축구는 몇 년 만에 베트남 중부와 북부로 퍼져, Le Duong Dap Cau, Olympique Hai Phong, 하노이 클럽(Stade Hanoien), Le Duong Viet Tri 등 강팀들이 탄생했다.
북부에서는 처음에 축구가 빈 들판이나 교차로에서 즐기는 오락에 불과했다. 1910~1920년대에는 Chop Nhoang(Éclair), 하노이 클럽(Stade Hanoien) 등 베트남 팀들이 힘을 합쳐 롱비엔 다리 근처에 Nha Dau 스타디움을 세웠다. 한편, Cot Co 스타디움은 당시 식민지 군대가 관리하던 Manzin 스타디움으로 불렸다.
프랑스인의 스포츠, 식민지 지배자의 오락이었던 축구는 이후 널리 퍼지며 민중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들은 이 스포츠가 점차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불씨가 되고, 나아가 공 자체가 혁명정신을 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20~1930년대에는 노동자 축구 운동이 확산됐다. 하이퐁 노동자, 철도총국, 하노이 전기 노동자, 남딘 방직 노동자 등 공장과 연계된 축구팀들도 다수 창설됐다.
이들 팀의 설립 목적은 체력 단련과 오락, 프랑스 팀이나 다른 베트남 팀과의 친선 경기, 교류 및 비밀 활동 조직 등 다양했다. 많은 혁명 간부들이 노동자 축구팀의 일원으로 비밀리에 활동했다. 이처럼 축구는 대중을 결집시키고, 민족 해방 투쟁에 힘을 보태는 수단이 됐다.
독립 초기의 정치적 임무
1945년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호찌민 주석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신생 정부는 기아, 문맹, 외세 침략, 내부 반역자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기쁨이 온전하지 못했다.
1946년 9월 14일 예비협정 체결 이후, 프랑스와의 관계는 극도로 긴장됐다. 당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재점령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우리는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인내하며 저항 준비 시간을 벌고자 화해를 모색했다. 이런 상황에서 축구는 뜻밖에도 긴장 완화를 위한 부드러운 외교 채널로 활용됐다.
당시 호찌민 주석은 하이퐁 시민들에게 프랑스 군함 Dumont D’Urville의 수병들과 축구 경기를 열어 베트남인의 선의를 보여주겠다고 깜짝 발표했다.
팀 구성 임무는 스타 선수 응우옌 란에게 맡겨졌다. 준비 시간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조직에서 혁명적 임무를 부여하면 어떤 어려움도 반드시 해내야 했다.
그날 밤, 란은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누비며 한 명 한 명 선수를 찾아다녔다. 몇 시간의 노력 끝에 ‘임시방편’ 축구팀이 꾸려졌다. 루엉 ‘단신’, 응우옌 통, 싸우 ‘이끼’ 등과 함께 B급 선수인 루엉, 푸(경찰), 데, 토앗, 지아오 등이 보강됐다. 훈련할 시간은 없었지만, 모두가 비상한 열정과 의욕을 보였다. 동시에 조직위는 친선 경기 정신(거친 플레이 금지, 과도한 경쟁 금지)을 강조하고, 반동 세력이 방해를 꾀할 수 있으니 경계할 것도 당부했다.
1946년 10월 21일 오후, Pho Ga 스타디움은 인파로 가득 찼다. 붉은 바탕에 노란 별이 그려진 국기와 “혁명을 지지하자”는 구호가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프랑스 팀은 키가 크고 단정한 유니폼 차림이었고, 하이퐁 팀은 체구는 작지만 노련한 기량과 ‘항구의 불사조’ 전통의 노란 유니폼을 입고 나섰다.
전반전에서 하이퐁이 1-0으로 앞서며 상대를 압도했다. 경기 중반, 조직위는 긴장 완화를 위해 프랑스가 동점골을 넣도록 ‘양보’하라고 지시했다. 후반전은 1-1로 마무리됐다. 조직위의 가장 큰 우려는 반동 세력이 경기를 이용해 소란을 일으키거나, 도발, 심지어 수류탄 투척이나 양 팀 선수 암살 등 테러 행위를 벌여 우리와 프랑스 간 분열과 불화를 조장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하이퐁 경찰의 큰 성과였다.
우정의 가교• 평화의 상징이 된 축구
하이퐁과 프랑스 해군팀의 축구 경기를 통해 양국 간 긴장된 분위기가 일부 완화되고, 우정이 증진됐다.
이 경기는 하이퐁 축구팬들의 열정을 충족시켰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 베트남의 독립이 아직 불안정하고 많은 압박을 받던 정치적 상황에서, 부드럽지만 효과적인 외교적 가교 역할을 하며 프랑스와의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평화적 협상 기회를 여는 데 기여했다.
이는 9월 2일 선포된 독립을 지키는 데 큰 외교적 ‘승리’였다.
식민지 지배자가 들여온 오락이었던 축구는 점차 단순한 오락을 넘어 베트남 정치·사회 생활의 불가분의 일부가 되었고, 민족 단결을 고취하고 독립 투쟁 의지를 키우며, 외교에서 효과적인 소프트 파워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그 역사적 경기에서 선수이자 병사였던 이들의 모습, 경기장에서는 온 힘을 다해 뛰고, 동시에 조용히 평화를 지키던 모습은 우리 스포츠와 외교사의 한 페이지에 깊이 새겨졌다.
이는 단순한 아름다운 추억을 넘어, 스포츠가 역사적 맥락에서 조국 수호의 대의에 정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립과 주권을 지키고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할 수 있음을 생생히 증명하는 장면이었다.